이순신 장군 업적 - 난중일기 명언 어록 모음
이순신 장군 업적 - 난중일기 명언 어록 모음 이순신(李舜臣) 출생 1545년 4월 18일음력 3월 8일 사망1598년 12월 16일(53세)음력 11월 19일 출생지조선 한성부 건천동(현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1가 31-2 / 을지로18길 19) 국적조선 본관덕수 이씨 시호충무(忠武) 자여해(汝諧)[ 호기계(器溪), 덕암(德巖) 이순신 장군 임진왜란 업적 1592년 4월 13일 임진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고 합니다. 5월4일 최초의 출격 작전(일명 1차 출전)으로 옥포만에서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적선 26척을 전멸시켜 임진왜란 최초로 해전에서 승리를 거뒀다고 합니다. 옥포 해전은 임진년에 벌어진 여러 해전의 전형적인 모델을 이룬다고 합니다. Search &Destroy. 즉, 수색 섬멸전은 이순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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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업적 - 

난중일기 명언 어록 모음


이순신(李舜臣)


출생


1545년 4월 18일

음력 3월 8일


사망

1598년 12월 16일(53세)

음력 11월 19일


출생지

조선 한성부 건천동

(현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1가 31-2 / 을지로18길 19)


국적

조선


본관

덕수 이씨


시호

충무(忠武)


여해(汝諧)[


기계(器溪), 덕암(德巖)


이순신 장군 임진왜란 업적


1592년 4월 13일 임진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고 합니다. 5월4일 최초의 출격 작전(일명 1차 출전)으로 옥포만에서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적선 26척을 전멸시켜 임진왜란 최초로 해전에서 승리를 거뒀다고 합니다.


옥포 해전은 임진년에 벌어진 여러 해전의 전형적인 모델을 이룬다고 합니다. Search &Destroy. 즉, 수색 섬멸전은 이순신이 임진년 당시 사용했던 기본 전략이었다고 합니다. 이 전투에서의 조선 수군 피해는 부상자 3명


옥포 이후 적진포와 합포에서 각각 5척과 15척을 추가로 격침하고 여수 전라 좌수영으로 귀환했다고 합니다.



5월 29일에 이순신은 노량에 적선들이 왔다는 정보를 듣고 2차 출전을 시작, 사천에서 적선 12척을 격멸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최초로 거북선이 투입됐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순신이 조총에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6월 2일에 왜선들이 당포에 집결해 있다는 걸 알고 당포로 향해 21척을 박살내고 당포에서 도망간 왜선들이 당항포로 도망갔다는 걸 알고 추격해 당항포에서 39척, 율포에서 7척을 격침했다고 합니다. 2차 출정에서 조선 수군 총 전사자는 11명. 이 공으로 8월 16일 자헌대부 승자를 받는다고 합니다.


7월 4일에 가덕도와 거제도 등지에 왜선 40여 척이 출몰했다는 정보를 들은 이순신은 3차 출전을 감행, 7월 6일 한산도 해전에서 승리한다고 합니다. 이는 대첩이라 부를만큼 세계 해전사에서 의미 깊은 전투였다고 합니다. 이때 사용한 전술은 거짓 후퇴로 인한 유인 후 함대 반전 및 포위 섬멸인데 이토록 복잡한 함대 운용을 보여준 해전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일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알키비아데스가 이끄는 아테네 해군이 스파르타의 해군을 상대로 쓴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전술을 실전에서 육지에서라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충분히 명장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을 정도다고 합니다. 이순신은 항구에 틀어박힌 적의 주력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유인해서 격파했다고 합니다.여기서 흔히 세간에서 이순신의 장기로 인식되는 학익진이 처음으로 구사되었다고 합니다. 학익진은 본디 단순한 포위 섬멸용 진형이나, 이순신은 이것을 거짓 도주하다가 돌연 180도 선회하면서 양쪽으로 날개를 펼쳐 적을 포위, 섬멸하는 전술로 개량하였다고 합니다. 성능이 우수한 전함, 강도 높은 군사 훈련과 지휘관의 대담성만이 학익진 성공을 담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거짓 후퇴 전술은 자칫 진짜 패퇴가 될 수 있는 매우 어려운 전술임을 생각해본다면 이순신의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한산도 대첩은 규모로만 따지면 국지전이었으나 그 결과는 임진왜란 전체의 국면을 바꾸어놓았다고 합니다. 적들은 남해안의 제해권을 조선에 넘겨주어야만 했다고 합니다. 보급로가 끊겼으며 적의 서해 우회를 좌절시킴으로서 조선은 전라, 충청, 황해 등 주요 곡창 지대를 지켜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군과 의병들이 끈질기게 저항할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곡창 지대가 온전히 남아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합니다. 조선군은 반격의 교두보를 확보했고, 지휘 계통 또한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대승을 거둔 조선 수군은 가덕도로 향하려다가 안골포에 적선 40여 척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7월 10일 안골포에 도착하여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등이 이끄는 왜선 40여 척을 추가로 박살내고 여수로 귀환한다고 합니다. 총 전사자는 19명. 이제까지 보다는 조금 많은 편이지만 그래도 새발의 피 수준이다고 합니다. 이 공으로 이순신은 정헌대부 승자를 받는다고 합니다.3차 출전으로 왜군의 수륙 병진 계획은 완전히 좌절됐으며 이 과정에서 가뜩이나 모자란 화약과 화포를 포함한 수많은 물자와 인력이 물고기밥이 되자 경악한 히데요시는 해전 금지령까지 내리고 만다고 합니다. 


게다가 보급 물품에는 군량 등 식량만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합니다. 조총의 탄환 및 조총의 부속품과 화약, 일본식 활의 화살 및 활대와 각종 병장기 관련 소모성 물품들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현지 조달을 통해 식량을 그럭저럭 구했다 해도 이러한 것들은 현지 조달로 구할 수 없으며, 당연한 말이지만 장비 보급이 안 되면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순신의 공로는 적의 해상 작전 전체의 봉쇄이자 보급로 차단이었으며 이를 통해 적의 기본 전략 자체를 붕괴시켰음을 의미했다고 합니다.8월 8일에 왜군이 김해와 양산 등지로 도주하려 한다는 정보를 받자, 이순신은 아예 적의 본거지가 돼버린 부산을 직접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8월 24일에 4차 출전에 나섰다고 합니다. 부산으로 향하는 길에 왜군이 5번이나 소규모 기습을 가하나 죄다 바닷속에 쓸어넣고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 대포로 포격을 퍼부어 왜선 100여 척을 죄다 가라앉힌다고 합니다. 이때 전사자는 6명에 불과 했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이렇듯 피해가 적었던 것은 거듭된 패전으로 조선 수군만 보면 학을 떼게 된 일본 수군이 조선군의 출현 직후 배를 버리고 죄다 육지로 도주해 버린 이유도 있다고 합니다. 덕분에 손쉽게 적의 배를 싹쓸이 했지만 이순신이 신임하던 녹도 만호 정운이 전사해서 대승을 거두고도 이순신은 침울한 귀환을 했다고 합니다.부산포 해전의 결과로 왜군은 더욱 조선 수군을 기피하게 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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