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사냥 유례와 기원 - 중세시대
마녀사냥 유례와 기원 - 중세시대 Compendium maleficarum(마녀 전서), 1626년, Francesco Maria Guazzo. 마녀가 악마에게 세례를 받는다고 묘사되어있다고 합니다. 당대 유럽인들은 마녀들이 '조직적'이고 '의례적'인 반교회라고 상상하곤 했다고 합니다. 또한 이 그림에서 보듯이, 마녀사냥의 배경에는 음모론적 공포도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가톨릭교와 신교는 과격한 종교적 수사법을 곧잘 구사하면서도 좀처럼 서로를 마녀술 혐의로 고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녀들의 주된 죄목과 종교개혁의 주요 논쟁 사이에 직접적 연관성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고 합니다. 예전부터 마을 주민들은 반사회적인 늙은 여자들이 주술을 걸고 고약한 저주를 내린다고 항상 의심했지만, 공식 박해에 시동을..
마녀사냥 유례와 기원 - 중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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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 유례와 기원 - 중세시대



Compendium maleficarum(마녀 전서), 1626년, Francesco Maria Guazzo. 마녀가 악마에게 세례를 받는다고 묘사되어있다고 합니다. 당대 유럽인들은 마녀들이 '조직적'이고 '의례적'인 반교회라고 상상하곤 했다고 합니다. 또한 이 그림에서 보듯이, 마녀사냥의 배경에는 음모론적 공포도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가톨릭교와 신교는 과격한 종교적 수사법을 곧잘 구사하면서도 좀처럼 서로를 마녀술 혐의로 고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녀들의 주된 죄목과 종교개혁의 주요 논쟁 사이에 직접적 연관성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고 합니다. 예전부터 마을 주민들은 반사회적인 늙은 여자들이 주술을 걸고 고약한 저주를 내린다고 항상 의심했지만, 공식 박해에 시동을 건 동력은 마녀들이 악마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악마의 명령에 따라 기독교 사회와 전쟁을 벌이는 대규모 배교자 군단이라는 의심을 굳혀간 신학자들의 확신이었다고 합니다.



서양 역사에서 있었던 통칭 '마녀재판' 은 사실 마녀재판이란 번역이 적절치 않으며 '특별재판' 이 적절하다고 합니다. 흔히 이단심판, 마녀재판으로 번역하는 라틴어 'inquisitio' 는 교회법으로 어떤 특정한 사항이 발생했을 때 임시로 개설하는 '비상설 특별재판' 이기 때문이다고 합니다. 즉 'inquisitio' 는 꼭 마녀나 이단만을 다루던 재판이 아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녀재판이란 단어가 워낙 한국어 언중에게 깊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 문서에서도 그대로 마녀재판이라는 단어를 쓰도록 한다고 합니다.




근세 이전에도 마녀사냥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중세시대 초중반 까지는 마녀를 처벌 하는 데에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12세기에 로마법에 대한 연구가 다시 시작되면서 그 전에 있었던 게르만족 풍습에 의한 살리카 법전의 사용빈도가 적어지고 새로운 로마법에 기초한 법전 체계가 등장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2세기 이전에는 게르만족 풍습에 의해서 피해자가 있어야만 고소가 가능했었다고 합니다. 즉 마녀에게 피해를 받은 사람이 있어야만 마녀를 고소 가능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진짜로 마녀에게 피해를 받은 사람이 있었을리 없으니 어차피 거짓 신고거나 착각이란 뜻인데, 결국 막장인건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마녀를 가장 맹렬하게 박해한 1570~1630년은 신교 국가들과 가톨릭 국가들이 교파화되고 이데올로기 전쟁이 가장 격렬하게 벌어진 기간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중략) 가톨릭교도들과 신교도들 중에 어느 쪽이 박해에 더 열을 올렸느냐는 것은 이견이 분분한 문제다고 합니다. 박해자들 중에서도 최악은 대게 독일의 작은 영역을 통치한 가톨릭 주교들이었다고 합니다. 일례로 뷔르츠부르크의 주교 율리우스 에히터 폰 메스펠브루니(Julius Echter von Mespelbrünn)은 가톨릭 개혁의 강경파로서 1616~1617년에 마녀를 300명 넘게 화형시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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